봉평에서...
- 글번호
- 23653
- 작성일
- 2006.09.29 12:29
- 조회
- 519
- 등록자
- 이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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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평창을 지나다 보면,늘 허생원이 생각나고 또 그 허생원을 낳은 이효석님도
생각나는....뭐랄까.첫사랑에 얽힌 장소를 지나는 것 처럼 어떤 그리움이 스며온다.
어제와 오늘 이틀 휴가를 내어 어제는 아들내미 운동회에 하루를 보내고 오늘은
달빛에 쏟아진 듯한 소금 같은 메밀밭에 함 가보자고....그리 길을 나섰다.
진짜 봉평길은 멀고도 멀었다.
'메밀꽃필 무렵'이 곧 지금의 삶의 현장인 듯이 그대로 살아 생생한 느낌을 받게했다.
자..그렇다면 잠시 가산 이효석님은 어떤 분인지 살펴 보기로 하자.
호는 가산,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출생,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로 재임하였다.
1928년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으며,
모더니즘 문학단체인 구인회에 참여하였고 1936년에 한국 단편문학의 백미라고 평가되는 '메밀꽃필 무렵'을 발표하였으며 심미주의적 세계관을 나타낸 '장미 병들다','화분'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그는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가 차남과 아내를 잃고 많은 방황을 하다가 그도 끝내 1942년 5월
25일 38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메밀꽃 필 무렵에 있었던 사건의 전개...
장돌뱅이 허생원이 당나귀를 타고 걸었던 봉평시장..달빛..물레방앗간,메밀꽃. 왠지 허생원을
닮음직한 동이에게 맘이 끌리고 ,이야기 속에 동이는 하룻사랑에 얻은 허생원의 아들임을 알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인가!. 평생을 장돌뱅이로 살아가던 허생원의 하룻밤 결실도 장돌뱅이로
살아가고 있는 대목에서 독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자 상봉을 설레게 하다가 에휴~!라는 한숨소리가 들릴 것 같다.
우리가 오늘 갔을때는 이미 메밀꽃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있어, 소금 뿌려진듯한 메밀꽃은
아쉽게도 보지를 못했다. 마침 봉평장날이라고 했는데..길이 멀어 장도 못 보고 올 수 밖에
없어 참으로 안타깝다. 아마 이효석이 이 글을 쓸 무렵이 좀 지난 듯....달빛이 휘영청 밝아
메밀꽃이 마치 소금 뿌려진 듯해 보였다면 지난 보름달이 뜰 즈음이었을 것 같다.
이효석의 기념관에서 여러 문학인들의 자필로 쓴 글이 전시되어 있었다.
춘원 이광수,모윤숙,윤동주님의 글씨에 더욱 눈이 오래 머물고..글씨를 이리 썼구나..하며
작품들을 떠올려 봤다.
여행이라면 자고로 풍경 좋은 단풍 구경을 가거나, 이름 있는 산엘 가거나, 니나노 춤 추는
맛으로 관광을 잡지만, 우리 부부는 이 먼길에 이효석을 만나러 왔으니 진짜 값 높은 여행이라고
자찬하면서......웃어댔다.
봉평을 지나 영월로 내려와 단종의 핏빛 애환이 담긴 청련포와 장릉에 다녀왔다.
참으로 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청련포에 가서 열일곱 나이에 죽어 갔던 단종임금의 넋에 엎드려 마음 울고 싶었었다.
권력이란 예나 지금이나 그 맛이 그리도 마음을 멀게 하는걸까?.
태백을 거쳐 원덕으로 꼬불꼬불 돌아오며 멀미가 나기 시작했다.
아내의 기분을 전환시키고자 시도한........봉평에서 이효석도 만나고 단종도 만났는데
이 어인 멀미가?........권력싸움에 대한 비린내로 구토가 나는 것일까?.
하루종일 운전을 하며 피곤타 말하지 않는 남편 요한이가 얼마나 고마운지..
투박한 손등을 쓰다듬어 주며....고마움을 대신했다.
쏘렌토 사서 첨으로 아이들 떼 놓고 둘이서 문학기행을 했었다.
담에는 어딜 가려나?
